loading
본문 바로가기
프로그램기록

꼬꼬무,<사라진 K2-해병대 총기탈취범과의 일주일 편> 내용 다시보기

by 와우짱 2023. 1. 27.
반응형

이번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이야기는

'사라진 K2- 2007 해병대 총기 탈취범과의 일주일'편으로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이훈, 최귀화, 그룹 앨리스 멤버 소희가 출연했습니다.

 

*현재 이 편은 웨이브(Wavv) 다시 보기는 잠정 중단된 상태입니다.

 

 

총기 탈취를 위한 시작은 차량 절도

때는 2007년 10월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중고차 매장에

한 손님이 그렌저를 차고 왔습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손님은

'지프차를 보고 싶다'라고 말한 뒤 매장을 둘러보다가 한 대를 가리킵니다.

사륜구동 코란도, 당시 뭇 남성들이 로망을 갖고 있던 차량으로

차를 시승하고 싶다는 말에 직원은 모자 쓴 남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시승을 하게 됩니다. 남자는 본인이 직접 차를 몰아봐도 되냐고 물었고

직원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는데, 남자가 잽싸게 운전석으로

몸을 옮기더니 철컥 문을 잠가버리고 혼자 차를 몰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기가 타고 온 차는 중고차 매장에 그대로 두고 가버린 남자, 매장 직원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차적조회를 해봤는데, 그가 타고 왔던 그랜저는 

이틀 전 강남에서 도난신고 된 차로 그랜저를 버려두고 또다시 코란도를 훔쳐

도망간 거였습니다.

 

모자 쓴 남자가 훔쳐간 코란도 차 번호는 '경기 나 9148'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CCTV나 목격자가 나오지 않았고 그를 만났던 중고차 매장 직원들을 통해

'키 170cm 정도 이국적으로 생긴 외모'였다는 증언 정도만 확보하게 됩니다.

 

코란도 절도 사건이 일어나고 2개월이 지난 2007년 12월 6일 

경기도 이천에서 도난된 코란도 차량이 강화도에서 발견됩니다.

그런데 차에 변화가 생겼는데

 

차량번호가 '9148'에서 9118'로 바뀌었고 차량 앞에 '캥거루 범퍼'라고 불리는

검은색 구조물이 장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캥거루 범퍼는 보통 범퍼보다

충돌했을 때 9배 정도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에 이 것이 단순 차량 절도가 아닌

뭔가를 칠 목적으로 이 차량을 훔쳐갔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오늘 오후 5시 50분쯤 인천 강호도 초지리 어시장 앞 도로에서 괴 차량이

군 초병 2명을 치고 총기와 실탄을 탈취해 달아났습니다. 사고를 낸 차량은

구형 코란도로 도로를 따라 걷던 두 병사를 뒤에서 들이 받은 다음

총기 1정과 실탄 75발 유탄 6발과 수류탄 1발을 탈취했다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내용 中

 

범인의 진짜 목표는 바로 '총'이었습니다.

유효사거리 600m  최대 사거리 3,300m인 K2 소총

그리고 실탄 75발, 유탄 6발, 거기에 살상반경이 15m인 수류탄까지 훔친 남자

 

군인, 그것도 해병대원 2명을 공격하고 이 많은 무기를 탈취해 간 이 남자는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촉즉발 상황을 만들었고

군과 경찰은 강화도 진출입을 모두 막고 강도 높은 검문검색을 벌이며

차로 달아난 범인을 찾기 위해 총력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발생 5시간 후, 강화도에서 90km 떨어진 경기도 화성시에서

'논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되었고 용의 차량인 코란도가 불에 탄 채로 

발견됐는데 범인이 차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간 거였습니다.

전소된 차량을 정밀 수색 했지만 탈취한 무기는 보이지 않았고

캥거루 범퍼도 떼어져 있었고 범인의 흔적은 지문 하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겨우 5시간 만에 벌어진 일로 범인은 검문검색을 뚫고 화성까지 

넘어가 차량을 불에 태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살상 무기를 훔친 범인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수도권 일대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경찰은 사건 당일 코란도의 행적부터 살폈는데

사건당일 오후 5시 40분 범인은 강화도 초지리에서 총기를 탈취하고

2분 만에 강화도를 벗어났고 검문검색 실시 전에 이미 강화도를 떠나

6시 10분 김포 양곡리를 지나고 7 시 10분 서해안 고속도를 이용해

7시 38분 청북 톨게이트를 통과, 10시 40분 화성시에서

전소된 코란도가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이 지난 톨게이트 CCTV를 확인해 보았으나 남자의 코와 입

얼굴 일부분만 찍혀 신원확인이 어려웠고 톨게이트 직원도

코란도 한 대가 톨게이트를 그냥 통과해 급히 차를 세워

요금을 수령했는데 그때도 남자는 우비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팔만 뒤로 내밀어 돈을 전달했기에 얼굴 확인이 어려웠었습니다.

이 CCTV 화면으로 범인을 특정 짓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범인의 얼굴을 확실히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본 유일한 사람 바로 범인에게 총을 뺏긴 해병대원이었습니다.

총기를 탈취당한 그날, 해병대 병사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범인에게 희생된 안타까운 군인의 죽음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강화도 안에 소황산도라는 곳

2007년 그날을 기억하는 소황산 분초 대원들이

꼬꼬무를 통해 처음 카메라 앞에서,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인터뷰해주었습니다.

[2007년 봄쯤인가 소황산 분초로 저희가 들어간 걸로 기억해요

그 사건이 터지면서 아주 지옥 같은 동네구나...'-송명근, 당시 상병

 

[제가 당사자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내가 나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런데 여러 번 생각해 봐 오히려 저는 저렇게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박정환, 당시 병장

 

이 분들은 당시 분초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분초는 인원 10명 정도의

작은 내무반으로 강화도를 둘러싼 해안선이 길어서 군인을 소규모로 나눠 배치

한 것입니다. 적은 인원이다 보니 시설은 열악했지만 대한민국 해병대 병사들은

바닷바람 앞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 나를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입대 7개월 차인 박영철 일병(당시 20세)

해병대는 100% 자원입대로 대구가 고향인 박 일병은 해병대에

입대하기 위해 두 번이나 도전했습니다. 해병대를 나와 훌륭한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20살이 되자마자 입대를 서둘렀는데

그 이유는 누나까지 두 사람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박 일병과 함께 전역 2개월을 앞둔 이 병장이 사건이 일어난 12월 6일 저녁

 바닷바람으로 뼈까지 시린 강추위 날씨였기에

군복 안에 내복을 껴입고 귀에는 귀마개, 온몸을 핫팩으로 무장하고

총과 탄통을 매고 근무에 나섰습니다.

 

분초원들은 차가 없었기에 30-40분 정도 걸어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이날 박 일병과 이 병장이 근무를 설 곳은 제일 끝에 위치한 초소였습니다.

오후 5시 30분 갯벌 위 제방도로를 두 병사가 걷고 있었습니다.

근데 멀리서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코란도 

그 범인이었습니다.

 

코란도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두 병사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더니 코란도가 두 병사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박일병을 치고 

곧바로 조금 앞에 있던 이 병장까지 두 병사를 뒤에서 들이받아 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붕 떠서 길바닥 위로 나가떨어졌고 이때 박 일병은 의식을 잃었고

이 병장은 몸을 못 가눠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코란도에서 진회색 모자를 눌러쓰고 베이지색 사파리를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이 병장에게 다가와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데 없어요?'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이 병장은 남자가 자기를 부축하려고 온 줄 알았습니다. 이 병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한쪽 손을 쓱 빼는데

뭔가 번쩍해서 보니 길이 25cm 정도의 길이의 칼이었습니다.

 

안심시키는 척하면서 그 칼로 이 병장을 공격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병장의 총을 빼앗으려고 손과 허버직지를 마구 공격했고 이 병장은 

칼에 찔리면서도 총을 지키기 위해 계속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바람에 그 가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 병장의 눈에 범인의 맨 얼굴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범인이 이 병장의 얼굴을 공격했고 발로 차버려서 이 병장을 길 아래 갯벌로 밀어버렸습니다.

 

범인은 이번엔 쓰러져 있던 박일병에게 다가갔습니다.

소총을 빼앗으려 했는데 소총 끈이 박일병의 손목과 팔에 칭칭 감겨있어

순간 의식이 돌아온 박 일병도 총을 뺏기지 않으려고 소총 끈을 잡고 버텼습니다.

 

계속 총을 잡고 버티니, 범인은 다른 쪽 주머니에었던 두 번째 칼도 꺼내

박 일병의 등, 허벅지, 옆구리 등 무려 7군데를 찔렀습니다.

그렇게 범인은 이 병장에게서 소총, 박 일병에게서 탄통을 빼앗아

현장에서 달아났습니다.

 

쓰러진 두 병사는 점차 의식이 흐려졌고 얼마 후 인근 주민이 쓰러져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해 신고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분초 대원들도 현장으로

충돌했는데 독한 훈련도 꾹 참아가며 했던 강인한 군인들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보고선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박 일병과 이 병장은 인근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고, 이 병장은 수술을 받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7군데나 칼에 찔린 박 일병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강화병원 가기 한 10분 전인가(영철이가) 누워있었는데,

손이 떨어지더라고요]

-박정환, 당시 병장

 

[영철이가 하늘에 먼저 갔다. 먼저 갔다고 그 얘기를 들었어요]

-송명근, 당시 상병

 

피를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총끈을 놓지 않았던 스무 살 젊은 청년이

그렇게 범인의 극악무도한 짓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찾은 무기

박일병이 사망한 뒤 경찰 조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는데

범인의 코란도가 사건 2주 전부터 강화도에 수차례 다녀 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범죄로 특히 끝에 있는 초소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범행 수법이나 행적등을 봤을 때 경찰은 범인이 이 부대 전역자 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대를 전역한 사람은 만명도 넘어 모두를 수사하기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용의자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야 했는데 하나는 격투 중 현장에 떨어진

범인의 모자, 또 이 병장이 휘두른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은 범인도 부상을 입었으니

어딘가 혈흔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병사의 소지품을 정밀 감식했습니다.

 

감식결과, 딱 한 군데에 다른 사람의 DNA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박 일병이 범인과

몸싸움할 때 생긴 범인의 혈흔이 박일병의 귀마개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이 귀마개와 이 병장의 기억을 토대로 범인의 신상이 점점 좁혀져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용의자의 혈액형은 AB형 키는 170~175cm 사이에 30대 남자

수배전단지가 작성된 이후 제보전화가 계속 걸려왔지만

결정적 증거는 부족했습니다. 무기를 갖고 있는 범인이

잡히지 않아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고 게다가 이때

2007년 12월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었습니다.

총기탈취사건 바로 다음날 태안 앞바다에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고

또 17대 대통령 선거도 바로 코앞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이 이 사건으로 인해 긴장을 하게 되는데

사건 3일 전 유세 하던 중 계란을 맞는 일이 있은 후

한나라당 사무실로 이런 협작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총기탈취범이라면서, 이명박 후보와 김종필 전 총재를 보면

위해를 가하겠다고..]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

 

이 협박전화 이후 이명박 후보는 야외 유세를 전부 취소하고, 인근 건물 옥상에

저격수까지 배치하고 본인은 방탄복까지 입어야 했습니다.

 

사건발생 6일째, 범인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고, 경찰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범인의 행적을 쫓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아주 의외의 곳에서 끊겼던 범인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바로 부산에서

이런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서 보내주세요, 총기탈치범입니다'라고 쓰여있는 편지가

부산 연제구 한 우체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맞춤법도 틀리고, 어린아이가 쓴 글씨체처럼 보였는데

편지 내용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 총기사건의 주범입니다. 먼저 저의 잘못으로 희생된 일병의 죽음에

큰 사죄를 드립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자수를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먼저 총기는 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 지나자마자 옆 가에 버렸습니다.

 

민간인으로부터 모자 혈액 등 구입, 범행현장에 방치 수사망을 돌림, 이로 인해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준 점 사과드립니다.

 

군의 민간범죄참여로 삼권 분립의 의미를 무색게 했으며, 한국식 민주주의가 또다시

5.18 광주사태와 같은 일,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살인을 범했지만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해 주시길 바라며...]

-범인이 보낸 편지 中

 

자기가 범인이고 총을 버렸다는 내용, 그리고 경찰이 찾은 단서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며 횡설수설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군경은 장성의 백양사 휴게소로 출동해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 편지는 범인이 쓴 것이 맞았고 탈취했던 소총과 실탄 전부

회수하게 되었습니다.

 

 

어이없는 범행 이유

편지에선 범인의 지문이 확인되어 피의자 인적 사항이 특정되었습니다.

국과수에서 대조한 결과 용산구에 거주하는 한 남성의 지문과 일치해

곧장 용산서에서 용의자 검거 지시가 떨어졌고 경찰들은 조 씨 검거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사건 발생 일주일째 12월 12일

조 씨가 종로에 나타날 거란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휴대폰 실시간 위치를 확인하며

점차 주변을 포위하였고 오후 3시 귀금속 상가에 걸어 나오는 조 씨를 발견하고

경찰이 다가가 조 씨 본인이 맞냐고 물으니 남자는 냅다 도망을 가기 시작하고

경찰들이 쫓아가 그를 체포하게 됩니다.

 

그렇게 강화도 해병대 총기탈취 용의자 조 씨는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서울 한 복판에서 검거가 되었습니다.

범인은 예상외로 체격이 왜소했습니다. 범인은 북에서 침투한 간첩도

해병대 전역자도, 특수부대 출신도 아니었고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 보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엔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도 조 씨가 총기 탈취범일 거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 씨의 방에서 아무도 몰랐던 

그의 진짜 모습이 발견되는데...

조 씨의 수첩에서 캥거루 범퍼 설계도가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조 씨가 직접 만들어 코란도에 설치했던 것으로

차량 번호판도 본인이 직접 위조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라늄 235.24만명 폭약, 16시간 불바다, 6천도 태양 겉 온도,

30만 명 리틀보이, 우주전쟁, 수소폭탄, 원자탄...]

 

조 씨의 메모에는 북한 관련 내용이나 원자폭탄 같은 무기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전문가들은 조 씨가 과대망상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조 씨의 집에서 공기총과 전기충격기등 다양한 무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조 씨의 개인 블로그에는 스스로 다중인격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개심과 두려움을

토로한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조 씨는 범행을 인정했지만 총기 탈취 이유에 대해섬 함구하였는데

그냥 충동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기만 했습니다.

강도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흉기를 갖고 강화도를 배회했다며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경찰은 계속 조 씨를 추궁했고 결국 조 씨가 이유를 털어놨는데

애인과 헤어진 뒤 세상이 주목할 범죄를 저질러 보겠다고 꾸민

단독 범행이었음을 자백하게 됩니다.

 

[언론에 보도될 만한 대형 사고를 일으켜서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파멸하는

모습을 전 애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전 애인이 고통을 받는 복수를 하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당시 해병대 헌병단장

 

범행을 일으키고 뉴스를 계속 보며 상황을 파악한 조 씨는 범인의 DNA가

확보됐단 소식을 듣고 총을 버리기로 결심한 조 씨는

자가용, 버스, 기차등을 갈아타며 총을 들고 전남 장성까지 갔고

휴게소 근처에 버리고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해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던 것이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단서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끼고 왼손으로 썼는데 편지를 부칠 때 맨손으로 만지며

지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감형과 우리가 기억해야 할 희생

12월 8일 유가족과 해병대 동료들의 눈물 속에서 박일병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조 씨는 민간인 신분이지만 군 무기를 탈취하고 군인을 해쳤기에

군사법정으로 넘겨졌는데, 군 형법상 군인을 공격하는 건 무기징역에서 사형까지

내려질 수 있는 국가안보를 흔드는 중대한 번죄로 조 씨는 초병 살해 및 상해

총기 탈취 혐의로 법정 최고형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조 씨가 항소해 2심에선 조 씨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사건 후 무사히 대통령 선고도 치러졌고 기름으로 뒤덮였던 태안 바다도 국민들 노력

덕분에 예전 모습을 되찾아 갔습니다. 두 병사가 겪은 피해는 적군과 싸우다 벌어진 것이

아니란 이유로 조금 더 조용히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 다른 큰 이슈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때 가장 비수가 된 말이 '어떻게 해병대가 총을 뺏기냐'며

피해 병사들을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박일병 가족들은 박일병과 우리 군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염려해 지난 16년간 재심을 신청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탈취된 무기는 전부 돌아왔지만 한 명의 군인이자 한 명의 아들이었던 박영철 일병만은

돌아오지 못했고.. 박영철 일병은 사망 후 한 계급 추서되어 지금은 고 박영철 상병이

되었다고 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