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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기록

꼬꼬무,착혈귀를 찾아라, 친일경찰 하판락은 누구?

by 와우짱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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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순서]

  • 독립투사 이광우 선생과 아들 이상국 님
  • 친일경찰 착혈귀 하판락을 쫓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68회에서는 아버지를 고문한

일제 부역 경찰을 찾아내 항일 공적을 복원한 아들의 사연을 다루는데

여기서 우린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광우 독립투사와 친일경찰 하판락 입니다. 

나라를 위해,몸과 마음 모두를 바친 사람과

나라를 등지고, 몸과 마음 모두를 바꾼 사람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친일파를 세상에 공개한 용기 있는

아들의 행적까지, 정리했는데요,

68화 게스트이자 이야기 친구는  김광규,장희진,적재가 함께 합니다.

독립투사 이광우 선생과 아들 이상국 님

'친일파 집안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한다.

친일파 자손은 저택에서 살고, 독립군 자손은 판잣집에 산다'

故 이광우 애국지사

이광우 선생님은 서슬 퍼런 일제 말기 제국의 군수공장이던

부산 '조선방직'을 폭파하려 했던 애국지사로 1940년대 초 동창생들과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만들어, 공장기숙사와 시장, 부두등에 수차례 살포했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동지들과 함께 친일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경우 열일곱.

 

처음 끌려간 곳은 경남경찰부 유치장으로

사회주의자와 항일활동 등 죄상이 큰 사건만 취급하는

경남고등부였는데, 이곳에서의 10개월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아무리 항일전단을 살포하는 행위였지만 이곳까지

끌려올 이유가 없었는데요, 알고 보니 비슷한 시기에 검거된 

울산·부산 ML(마르크스레닌) 연맹 연루 사회주의자 이미동과 여경수 등의 사건과

전단살포사건을 묶기 위한 계략이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죄를 인정한다는 말을 받아내기 위해

매일매일 유치장에서는 모진 고문이 계속 이어졌는데

결국 이미동과 여경수, 손 모 씨 등 3인은 고문을 받던 중 옥사를 하고 맙니다.

 

ML연맹의 하부조직으로 조작하려 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친일경찰은 이번에 같은 직장 경남토건협회 동료였던 김순곤 지사와

엮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김순곤지사는 과거 상해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당시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고춧가루를 탄 물로 고문하며

다리에 집중적인 고문을 당하면서도  없는 말을 지어낼 수는 없었기에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동지들은 기소유예가

되었지만, 전단지가 방에서 발견됐다는 이유로 이광우 지사만 기소되어

3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죄명은 소위 일제의 치안유지법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돼 2년여 옥살이를 하다 광복을 맞아 출소하게 되었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뼈아픈 과거를 자식들에게 단 한 번도 자세하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는데요, 그럼에도  매해 8월 15일만 되면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크고 비싼 빵집에서 사 온 카스텔라를 사 오셨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응, 내 생일이다'

'아버지 생신 3월이잖아요.'

'내 생일은 두 개란다.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야. 좋은 날이지'

 

커다란 카스텔라를 두고, 가족들은 웃음을 지으며 빵을 나눠 먹었는데,

차남 이승국 씨는 그럴 때 아버지가 들려주신 일제의 만행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나이 17살 그 어린 나이에 3년형을 받고

고된 옥살이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버지의 위대한 과거가 궁금해졌고,

또 반대로는 이렇게 고생하셨는데 , 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신 걸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친일경찰 착혈귀 하판락을 쫓다

아버지의 과거를 밝히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기록된 판결물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판결문이 없었습니다.

2000년 故이광우지사와 아들 이상국씨

김천소년형무소의 기록은 6.25 전란 중 불에 타 없어지고

부산형무소의 미결 기록도 없었습니다. 해방 후인 1949년 반민특위가

잠시 활동했지만, 그 기록도 이승만 정권의 친일청산 거부로 사라져 버려

정부는 '공적자료'를 요구하는데 제출할 자료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89년 낸 독립유공자 신청서는

'증거자료 불충분'의 이유로 유보되고 맙니다.

 

이때부터 아들 상국님은 주말을 반납하고,

아버지의 노고를 인정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하며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고 

김천소년교도소도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뾰족한 답을 얻을 순 없었습니다.

 

서울, 김천, 진주, 대전, 어디에서도 아버지의 공적을 증명할 문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보낸 세월이 어느새 10년, 그 사이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 비용도

들었고 아버지도 점점 나이를 드셔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적으로 아버지가 이름 석 자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하판락'의 소재가 확인되었는데, 1997년 부산일보

'어버이날 포상대상자명단'에 하판락의 이름과 그의 주소가 적힌 기사

가 실린 것이었습니다.

하판락. (창씨개명 가와모토 마사오)

일제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계 외사주임으로

경부보(지금의 경감)를 지냈습니다.

 

그는 쳑헐귀, 고문귀, 살인귀등 귀신으로 불렸는데

그가 이 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고문당한 사람의 증언을 빌리자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을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고,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으며,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고 합니다.

 

이광우 지사도 체포 이후, 하판락에게 직접 고문을 당했는데

자백을 강요하면서 거듭 부인하는 그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고, 이어진 전기고문, 물고문, 다리 고문

그리고 이른바 '착혈고문'이라 불리는 고문법으로 

사람을 사지로 몰아세웠다고 합니다.

 

'착혈고문'이란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해 혈관을 통해 주사기 

가득 피를 뽑고,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들에게 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취조를 하고 자백을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 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앞서 말했던 여경수 이미경 등은 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하였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불구자가 되어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는데,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을

했다고 하네요.

 

친일경찰 하판락은 해방 이후에도, 민 군정의 '일제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는데요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7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재력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해 엄청난 부를 쌓고

2003년 9월 향년 92세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떠났다.

친일파로서 가장 끝가지 살다가 떠난 이가 하판락으로,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친일파이기도 했습니다.

친일인명사진 출처-민족문제연구소

 

친일경찰 하판락의 존재를 밝힌 이가 바로 이광우 지사의 아들 이상국 씨(63)

그는 1999년 10월 KBS기자들과 함께 하판락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하판락의 입에서 아버지의 항일운동에 대한 증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는데요, 하판락은 이때 고문사실을 부인했는데, 당시 하판락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던 일제경찰 '김소복'의 이름이 나오자 입장을 바쒀

고문을 지시하기만 하고, 실행한 것은 김소복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증언으로 인해 이광우 님의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자료가 됐습니다.

 

이상국 씨는 10여 년의 노력 끝에 이광우 투사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하판락의 존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친일행적을

밝히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이광우 투사는 2007년 3월 26일 지병으로 82세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아들 이상국님과 이광우독립투사 묘소 전경(사진 시빅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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